황상익교수님은 서울대의대 교수로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연구위원이십니다.

2001년 3월 16일(금) 오전 6시 20분.
 
”전화해.” 지하철역까지 바라다 주며, 외지에 나가서도 전화를 잘 하지 않는 나에게 아내가 던진 작별인사말이다. ”그래”라는 늘상 하는 건성의 대답도 이번에는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 가졌던, 미국이나 중국에 있는 친지를 통해 3각통화를 해 볼까 하는 조금 치기 어린 생각도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다. 지하철 열차 속에서도 들고 나온 신문이 눈에 잡히지 않는 것이 여느 여행 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북쪽 사람들을 종종 대해 왔고 또 북쪽에 대해 웬만큼은 안다고 여겨 왔기에, 초행길이지만 그리 긴장될 것은 없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무색한 일이다.

3월 16일 오전 9시 55분. 

대한항공 KE 851편에 몸을 실었다. 오만가지 생각과 느낌이 머리와 가슴을 스치지만 어느 것 하나 또렷이 잡히는 것은 없다. 승무원들이 나누어 준 입국카드의 국적을 적는 난에 ”中國公民(含港澳台)”라는 부분이 머리와 가슴에 박힌다. 이미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된 홍콩(港)과 마카오(澳)는 말할 것 없고, 타이완(台) 사람도 중국국민이라는 뜻일 게다. 5번째 중국행이지만, 왜 이번에만 그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일까? 

타이완의 입국카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통일이 되기 전, 남·북 양쪽의 입국카드에 그러한 표현이 들어갈 날이 올까? 말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같은 동포, 같은 인간으로 서로 대접하는 날이 언제일까? 막연한 상념 가운데로 베이징 공항의 모습이 밀고 들어온다. 내일은 다시 북쪽 비행기를 타고 오늘 온 만큼의 시간과 거리를 ’공연히’ 날아가겠지. 그러나 금방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형편으로는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두 바퀴를 돌더라도 평양에 가면 됐지. 이건 너무 위축되고 초라한 생각인가?

3월 16일 오후 1시 55분. 

베이징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사관 앞이다. 이제 예정대로 입국사증만 받으면 된다. 꼭 1년 전 사증뿐만 아니라 고려민항 좌석표까지 받아들고도 평양에 가지 못한 경험이 있지만 설마 그런 일이 또 일어나려구! 영사관이 오후 업무를 2시에 시작한다기에 시간 맞추어 왔는데, 문이 열릴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오전 일이 지연되어 그러는 거겠지. 정확히 23분이 지나 현관문이 열렸지만, 이번에는 담당자가 도착하지 않았단다. 

영사관 민원실의 정면 벽에는 백두산을 배경으로 신사복 차림의 김 주석과 인민복장을 한 김 국방위원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데스크 뒷면 벽은 삼지연 쪽에서 바라본 백두산을 묘사한 그림이 장식하고 있다. 흔히 보는 그림들이지만 ’당연히’ 감회가 새롭다. 한 30평쯤 되어 보이는 민원실 홀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북쪽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나타내는 것이겠지만 검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그곳에서 한 시간 남짓 있으면서 신문도 보고 메모도 하고 하였지만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낮에도 환하게 불을 밝혀야 정상인 것처럼 여기는 나(우리)조차도. 이 점은 평양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평양제1인민병원도, 어린이영양관리연구소도, 인민대학습당도, 고려호텔도, 냉면집 옥류관도, 그밖에 어떤 곳도 공연히 대낮에 불을 밝히는 법은 없었고, 그렇다고 활동에 지장이 있는 것도 전혀 아니었다. 풍족함(?)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얼마나 낭비적으로 사는가 하는 생각이 부끄러움과 함께 다가온다. 

그에 따라 한가지 결심을 하였다. 남쪽으로 돌아가면 대낮에 쓸데없이 전기불을 켜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이 결심도 여느 것들과 마찬가지로 작심삼일로 끝났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일이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올랐으니, 이제부터라도 실천을 해야겠다. 적어도 10분 이상 외출을 할 때 연구실의 불을 소등해야지. 나아가 1시간 이상일 때는 컴퓨터도 꺼야지. 사증 발급을 담당하는 영사부장이 늦는 바람에 홀에 비치된 <로동신문>이니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이 발간하는 <통일신보>니 등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1면 머리의 제호 양쪽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한마음 한뜻으로 받들어 나가자!”라는 표어가 실린 <로동신문>은 이제 남쪽에서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보게 되었지만, ’공화국’의 영사관 속에서는 느낌이 새롭다. 

그리고 <통일신보>는 직접 대하기가 처음이었거니와 리병남 초대 보건상에 관한 기사가 실려 더욱 흥미로웠다. 그 동안 나는 리병남 선생의 후기 생애가 궁금하였는데, ”애국렬사릉을 찾아서. 리병남선생. 보건상박사(1903.12.9-1977.2.18)”라는 제목의 기사는 궁금증을 상당 정도 해소해 주었다.........

조금이지만 북쪽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료 타령’을 많이 하고, 그 점에 스스로의 게으름을 전가하곤 했는데, 신문조차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자료 운운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게 여겨진다.

3시 무렵 영사부장이 드디어 나타나 거침없는 태도로 데스크의 불을 켰다. 

그 자리에서 사증(발급비용 45달러)을 발급받은 사람은 20여명 되는 것 같았고, 그 중에는 우리 일행 말고 남쪽 사람으로 삼성그룹 계열사 직원 두 사람이 있었다. ”이름 황상익, 목적지 조선, 통과지 평양, 사증종류 입국 출국, 유효기간 1개월, 체류일수 8일간, 발급날자 주체 90(2001)년3월 16일”등이 적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증 No. 28260783”을 손에 받아든 것은 3시 30분이었다. 

불발로 끝난 ’통일음악회’ 및 부대행사 참가를 위한 지난해 4월의 경우는 단체사증을 발급받았기 때문에 나는 사증을 구경도 못하였던 터라 ’촌스럽게도’ 제법 감격스러운 느낌이다. 

펴양공항에서 출국할 때 사증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큰 전리품이라도 도는 듯 숙소인 캠핀스키 호텔 복사점에서 사증을 복사하였다. 

3월 16일(금) 오후 6시 40분. 
북쪽 당국이 직영하는 해당화 식당의 별실에 우리 일행 7명과 우리를 도와주러 나온 베이징 주재 한화그룹 직원 두 사람이 둘러앉았다. 

”남북어린이어깨동무”가 지난해 북쪽에 지원한 구충제(메벤다졸)와 그 밖의 물품들이 북쪽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지, 또 앞으로 남북이 협조할 일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북쪽 관계자들과 논의하여 협의할 것을 목적으로 한 우리 방북단의 구성은 이러하다. 

구충제 사업에 재정 지원을 한 한화그룹의 최욱락 사장(한화무역)과 유덕종 팀장(그룹 홍보실), 두유 사업에 물자를 제공한 정식품의 정성수 부회장, 그리고 어깨동무의 권근술 이사장(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이기범 사무처장(숙명대 교육학과 교수), 김석만 지도위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과 교수), 그리고 나, 이렇게 일곱 사람이다. 이 가운데 최 사장과 권 이사장은 한 차례, 이 사무처장은 두 차례 방북 경험이 있고, 나머지 네 사람은 ’신인’인 셈이다. 

단고기무침, 가자미식혜, 녹두지짐, 통김치, 명란젓, 냉면 등을 주식과 안주로, 그리고 백두산들쭉술 등 주류를 곁들인 ’최초의 만찬’은 설렘과 긴장 속에서 두 시간 가량 지속되었다. 평양식 음식도 그렇지만 재치 있고 친절하게 접대봉사를 하는 지혜로운 북쪽 여성들 덕택에 우리는 이미 북쪽 땅에 몸과 마음을 안기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들쭉술 몇 잔에 평소와 달리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진다. 점심 무렵부터 감기기운이 약간 있어서 타이레놀을 먹어 두었는데, 영 약효가 없는가 보다. 나는 어렸을 때는 환절기와 겨울철이면 아예 감기를 달고사는 약골이었지만, 다 자라서는 특히 40대에 들어서는 감기와 거의 담을 쌓고 지내던 터였다. 

사실 평양에서의 일주일은 독감과 ”사투”를 벌인 ”고난의 행군기(期)”였다. 과장이 조금 섞여 있기는 하지만, 죽음의 위협마저 느낄 정도로 생애 최고의 병고를 치렀던 것이다. 환자 진료와는 무관한 사람이지만, 명색이 방문단의 유일한 의사로 다른 분들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준비해 간 해열제는 나흘만에 거들이났고 유 팀장 등에게서 얻은 약도 평양을 떠나기 전날 점심에 동이 났다. 

우리를 안내해준 동무들, 특히 최 동무가 늘상 안스러운 표정으로 안부를 묻곤 했지만, 약
을 구해달라는 말은 최 동무에게도 또 고려호텔에서 만나는 다른 남쪽 사람들에게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방을 같이 쓴 이 교수에게는 친선병원에 가볼 구실이 생겼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건넸건만. (친선병원은 과거에는 다른 의료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무상진료를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외국인에 한해서 진료비를 받는다는 것이 이번 9월에 방북했던 박진원 어깨동무 사무차장의 전언이다. 이것도 북쪽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박차장은 평양에서 손을 다쳤다는데, 안내원동무에게 부탁을 하여 친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남쪽 사람은 외국인 범주에 들지 않기 때문인지 치료비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양반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는 나이지만, 얼어죽어도 곁불 쬐지 않을 점은 여지없이 남산골 샌님 꼴이다. 

만약 남쪽에 큰 기근이 든다면, 게다가 나보다는 조금 주변머리가 나은 아내조차 없다면, 나부터 굶어죽으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새삼 확인한 점에서도 일주일 간의 평양 체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이라면 방북을 하는 경우, 온갖 약을 충분히 휴대하시라. 박차장 정도 도는 대범한 사람에게는 필요없는 충언이겠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나이지만,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고려항공 비행기에서는 아리따운 북녘 여성 승무원 동무에게 내 생애 최대의 용기를 내어 약를 부탁했고, 그 동무는 곧 천사의 손길을 내밀었다. 

더욱 고마웠던 것은 조금 뒤 다시 와서 상태를 확인한 점이었다. 한번 해 보면 이력이 붙는지, 베이징에서 서울고 돌아오는 대한항공편에서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는데, 곧 약을 가져다 준 것을 마찬가지였지만, 안부를 묻지는 않았다. 이 차이를(고무찬양죄를 무릅쓰고) 확대해석할 필요는 엇을 것이다.